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유신 (문단 편집) === 배경 ===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센고쿠 시대|일본의 전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에도 막부]]를 세운 이후로, 근세 일본은 200년 넘게 에도 막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막부#s-3|막부]] 체계는 도쿠가와 가문의 근거지인 [[에도]][* 현재의 [[도쿄]].]에 세워진 막부가 300명 정도의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 위에 군림하고, 또 각 다이묘가 많은 수의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번(제후국)|번]]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봉건제]]였으며, 다이묘 밑으로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이루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오랜 내란을 끝내고 확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하였고 [[임진왜란|조선 원정]] 실패의 여파도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 시대 동안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상공업이 번성하였으며 문화도 융성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무라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무사 계급 (이후 '[[사족]]'이라고도 표현함) 내에서 에도 막부에 대한 여론은 악화 일로로 접어들었다. 지속적 평화와 방만한 국가 경영의 시기 동안 사족의 지위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으며, 막부는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자연재해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무리 무술과 학문을 수양해도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 없는 현실에 분개하는 사족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막부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13세기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들을 통해 [[성리학]]이 전래되고,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유학자들과 [[조선통신사]]를 통해 성리학이 융성하면서,[* 일본의 성리학은 13세기 중국에 유학했던 [[선종]] 승려들이 많은 양의 서적을 들여와서 널리 보급했던 것이 시작이다. 14세기 초에는 승려 현혜가 [[고다이고 덴노|고다이고 천황]]에게 한 성리학 강연이 [[겐무 신정]]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비록 겐무 신정은 3년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를 통해 성리학의 명성이 높아졌고, 15세기 초에는 아시카가(足利) 학교가 세워져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성리학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성리학은 여전히 선종 불교 내에서만 연구되었다는 한계가 있었고, "자신들의 성리학 이해가 과연 해외 성리학 선진국의 해석과 비길만 한가?"라는 의문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강항]]과 같이 전쟁 중에 조선에서 끌려온 유학자들이 일본에 조선의 성리학을 전수해주었으며, 전쟁 이후에는 조선통신사로부터 한땀한땀 가르침을 모으면서, 일본의 성리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때 강항에게 조선 성리학을 전수받은 [[후지와라 세이카]]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성리학 강연을 하면서 명성을 떨쳤고, 후지와라의 제자인 [[하야시 리잔]]은 일본에서 성리학이 막부의 관학(官學)으로 정립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다만 17~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성리학은 [[도그마|교조화]]되어가던 조선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조선에서는 성리학 지식을 물어보는 [[과거 제도|과거]]를 통해서만 [[출세|입신양명]]을 이룰 수 있었기에 기득권층이 자신의 사문과 다른 새로운 사조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탄압했던 반면, 일본의 성리학은 거의 개인적인 수양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기에 학문이 역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42994#home|관련기사1]][[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0957/1|관련기사2]]][* 조선의 성리학이 [[불교]]를 [[극딜]]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불교 승려가 성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본래 [[윤리학]]이었던 [[유교]]가 불교와 [[도교]]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 성리학과 같은 신유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본의 승려들은 성리학을 불교 철학을 이해하는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으로써 연구했다. 또한 비록 신유학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을 정립한 [[주자(철학자)|주자]]가 불교를 극혐하기는 했지만, 다른 중국의 신유학자들 중에 불교에 우호적인 사람도 많았다.] 성리학 특유의 통합적이면서도 수직적인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 사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된 일본'이라는 생각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성리학이 중국 사상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본 고유의 정신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국학(일본)|국학]]이 발생하고 유행하였는데, 국학은 일본 토착 종교인 [[신토]]와 결합하여 천황을 숭배하는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때문에 점차적으로 천황을 막부보다 더 높게 쳐주는 풍조가 발생하였다. 점차 쇠약해져가던 막부의 지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들을 끌고와서 '평화적으로 교역에 응하는 것'과 '교역을 거부하는 대신에 전쟁을 감수하는 것' 중에 양자택일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쿠로후네 사건]]) 사실 일본인들은 서양의 [[열강]]들이 [[동아시아]]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페리 제독의 내항보다도 한참 전부터 듣고 있었으며, 특히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자타공인 동아시아 최강국인 [[청나라]]가 어떻게 [[대영제국]]에게 묵사발이 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도 막부는 아예 처음부터 서양 국가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중국이라는 더 큰 먹이에 골몰하느라 일본이 문을 닫아걸자 일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미국의 경우는 달랐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서 출발한 증기선이 [[북태평양]]을 가로질러서 일본 근해까지 오면 [[증기 기관]]의 연료인 [[석탄]]을 보급받아야 했기 때문에,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하려면 일본에 안정적인 보급항을 확보할 필요가 있어서 일본의 개항에 보다 진심이었다. 사실 일본은 국토의 폭이 좁고 길기 때문에 모든 주요 지역이 바다에서 멀지 않아서 바다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고,[* 해안선에서 가장 먼 내륙 지역도 바다에서 13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특히 막부가 있는 에도와 천황의 황궁이 있는 [[교토]]는 만약 미국이 아편전쟁의 영국군처럼 군함의 함포 사격 지원을 받은 해병대로 공격해올 경우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사실 적극적으로 공격할 필요도 없이 그냥 도쿄만 입구에 군함 몇 척 띄워놓고 에도로 들어가는 물자만 막아버려도 에도 막부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포함외교]] 참조.] 결국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의 주도 아래, 막부는 청나라처럼 얻어맞느니 평화적으로 통상조약을 맺기로 했다. 이때 막부가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겪게 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관세권을 박탈당해 해외의 공산품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없고,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을 줌으로써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처벌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아편]]을 금지할 수 있는 조항을 넣은 것이 막부의 수확이었다. 한편 막부도 개항에 대한 여론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비난을 피하고자 위로는 천황의 허가를 받고[* 원래부터 외국과의 조약은 천황의 결제가 있어야 하는 사항이지만, 실권을 막부에 빼앗긴 명목상의 군주였던 천황은 막부의 결정에 대한 거수기에 불과했다. 이 때와의 차이점은 '개항에 대한 천황의 결정을 막부가 받든다'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잘못을 천황에게 떠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래로는 다이묘들과 회합을 열어 여론을 수렴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과거 힘으로 다이묘들을 찍어누를 수 있었던 막부라면 하지 않았을 이 꼼수는 결국 막부의 거대한 [[자충수]]가 돼 버렸다. 당시 [[고메이 덴노|고메이 천황]]이 '짐은 이인[* 오랑캐, 서양인]이 싫다'며 결재를 자꾸 미뤘고, 다이묘들과의 회합은 서양 국가에 대한 결사항전을 외치는 성토장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오히려 막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됐고, 막부는 천황의 허가도 받지 못한 채로 모든 다이묘가 반대하는 조약에 서명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한편 일단 미국과 조약을 맺게되자 영국을 비롯한 다른 서양 국가들도 몰려왔고, 막부는 이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